2020 2020.01.11. 제55차 학술포럼: 조중걸 박사 특강 "현대철학과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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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음악미학연구회 댓글 1건 조회 136회 작성일 20-03-18 17:36본문
- 일시: 2020년 01월 11일 토요일 오후 3시
- 장소: 220동 202호
- 연사: 조 중 걸 (미국 예일대 박사)
- 좌장: 지 형 주
현대철학과 예술
해가 바뀐 첫 학술포럼에서 조중걸 박사님을 모시고, <현대철학과 예술>이란 주제로 강연을 진행하였다. 음악과 미술을 아울러 현대예술사에 대한 명쾌한 해설을 들어보도록 하자.
음악, 미술에 있어 철학이 가지는 의미 및 중요성은 어떻게 설명 가능할까? 형이상학적 해명이 아닌 이상, 이에 대한 해명은 불가능할 것이다.
현대 예술은 크게 추상예술과 신사실주의예술 두 가지로 나뉜다. 가령 미술에 있어 ‘추상’이라 함은, ‘신사실주의’라 하면 흔히 ‘팝아트’로 알고 있는 장르이다. ‘표현주의’, 특히 ‘추상표현’은 사실상 죽은 미술이다. 이렇게 분류 가능한 이유는 모두 “형이상학” 때문이다.
모든 예술쟁점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단 하나, ‘인간 이성’이다. 이는 순수 이성이며, 경험에 호소하지 않고 우리의 순수한 사유만을 쫓아갈 수 있는 역량을 의미한다. 이것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수학이다. 그렇다면 인간 이성의 존재가 가능한 것일까? 고전주의예술에서는 이를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하며, 고전주의예술이 흔들리는 순간은 인간 이성이 붕괴하는 순간이라 볼 수 있다.
인간 이성이 존재하는 것으로 전제했을 때, 예술에 있어서 이는 ‘미메시스’로 표현된다. 낭만주의 이전에는 우리에게 현상으로 드러나는 이면에 있는 세계의 본질을 자연이라 보았다. 이러한 자연에 대한 모방을 예술로 보았으며, 플라톤은 이를 추방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유일하게 허용되었던 예술은 음악으로 그 중에서도 ‘도리안 선법’만이 가능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주장에서 벗어나 예술을 구원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예술을 옹호하는 데에는 두 가지의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1. 현상의 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이면의 원리, 즉 자연이 존재한다.
2. 인간은 이를 포착가능하다
(2)는 인간이 순수 이성을 가진다고 치환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술가는 자연을 모방함으로서 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애초에 개념이 존재하며, 이를 기반으로 유사한 것들을 모아 같은 개념으로 보는 사상은 근대의 실제론, 현대에 와서 합리론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이와 반대로 유사성에 의해 개념이 추출되며, 만들어진 용어가 실제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는 사상은 근대의 유명론, 현대의 경험론으로 분류된다. 이러한 논제에서 고대에서는 사물에, 근대에서는 사실에 초점을 두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과학에 대한 믿음은 미신이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경험론에 입각하게 되면 모든 포괄적 사실은 거짓이 되며 각각의 개별적 사실들만이 사실이다. 포괄적인 것을 조건이나 관습이 아닌 ‘법칙’으로 보는 순간 이는 거짓이 된다. 결국 모든 것은 기호, 즉 언어의 문제이다. 과학자들은 실제성이 아닌 유사성만으로도 과학적 진술을 할 수 있다 논한다. 굳이 ‘개별자들의 보편적 컨셉’을 만들어서 두 개의 세상으로 양분할 필요가 없다 주장한다.
이제 고전적 예술에 대한 정의는 인간이 ‘심미’를 모방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모방과 창조에 대해 생각해 보기에 앞서 ‘재현’이라는 개념을 살펴보자. 우리의 세계는 결국 언어의 세계이고, 언어로 설명가능한 것만이 우리 세계의 전부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예술을 언어의 관점에서 바라보도록 하자. 재현은 마치 한자어처럼 특정 개념을 닮은 것은 추구한다. 그러나 현대예술의 이면에는 재현이 아닌 자의가 담겨있다. 이는 차미 기호언어에서 기호와 개념의 결합은 자의적(arbitrarg)인 것과 같다. 이처럼 그 근원을 포착하고 이를 재현하고자 하는 것이 고대예술이다. 반대로 자의로 잔뜩 이루어진 것이 현대예술이다.
18세기 중반 경험론의 대두 이래 모방의 세계는 의심받기 시작한다. 그러나 19세기 시작된 산업혁명을 비롯한 유럽의 부흥은 이러한 의심의 눈을 가리게 만들었다. 1914년 즈음 유예된 이성의 파멸은 근대를 현대로 바꾸어놓았다(이에 대한 격렬한 분노를 확인하고 싶다면 크리스찬 사라의 몇 차례에 걸친 ‘다다익선’을 읽어보라). ‘기호학’과 ‘언어학’, ‘상대 역학’, ‘논리 철학 논고’ 등이 한꺼번에 쏟아지기 시작하며 각 분야에서 몰락하는 이성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기호의미를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그 의미에 대해 알지 못한다. 기호의미의 심미적 배열은 세계의 재현, 세계의 올바른 표현을 할 수 있도록 만든다. 이러한 사실을 포착하고 담아낸 인물이 바로 몬드리안이다. 이미 세계 속에 있었던 추상성을 통해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 그리하여 어떠한 종류의 필연성을 잃어버린 세계가 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하나의 세계를 우리가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혹자의 말처럼 “인류가 하나의 행성을 떠맡은 것”이다. 어떠한 종류의 구상적 요소도 없었으나, 인간은 추상을 바탕으로 구상의 세계를 그려내었다.
모방의 대상이 사라져 버린 지금, ‘이래야 한다’는 예술의 정의는 사라졌다. 르네상스의 예술은 어떠한 작품이 예술로 취급받는가의 아래에는 이에 내재된 대상이 있었다. 이는 모방의 대상이 뚜렷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기준이 되는 모방의 대상은 작품 속에 녹아서 판단의 근거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 이는 무참히 깨어졌다. 이제 어떠한 것이 예술이 되는가 되지 않는가는 그저 “이것이 예술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에 달렸다. 내가 이를 예술이라 칭한다면 이것은 예술이 된다. 이에 좋은 예술도 좋지 않은 예술도 사라졌다. 뒤샹이 갤러리에 변기를 가져다두며 한 말은 이를 예견하고 있지 않았을까. “내가 무엇을 가져와도, 이를 예술이라 칭한다면 이는 예술이다.” (정리: 이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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